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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생정(鳳笙亭)의 오해와 진실
이기정 사단법인 문경새재아리랑보존회 이사
등록날짜 [ 2024-08-05 21:54:27 ]

봉생정(鳳笙亭)의 오해와 진실

 

이기정

사단법인 문경새재아리랑보존회 이사


내 고향 문경시 마성면 신현3, 일명 봉생리에는 봉생정이라는 정자가 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와전으로 인하여 생뚱맞게도, 서애선생께서 즐겨 찾으시던 곳이니, 혹은 서애선생께서 지으셨다는 이야기가 전해 오면서 진실이 가려지고 와전된 사실이 진실을 덮어 버린 곳이 바로 봉생정입니다.

 

봉생정은 풍수지리상으로 군왕지지, 즉 산소를 모시면 임금이 난다고 하여, 조선 조정에서 정자를 지었으나, 임진왜란이라는 전란을 8년여를 격고 나니 돌보지 않아서, 피폐해지고 있었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이괄의 난이 일어나서 조선의 존망이 위태로울 당시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나서 조선을 구하게 됩니다. 이때 문경지역에서 일어난 의병들 중에 마성면 노목리(현재 외어1-늘목)의 진성이씨 문중에서도 의병에 참여를 하여 2등 공신에 책봉이 됩니다. (이는 무신창의록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당시 노목(늘목)의 진성이씨 문중의 부()는 문경에서 뿐만 아니라 조선에서도 소문이 났었던 때입니다. 하여 조선의 조정에서 피폐해진 봉생정 정자를 노목(늘목)의 진성이씨 문중에 공신록으로 하사를 하였습니다.

 

당시 조선의 조정에서는 재정이 지방의 정자를 돌보지 못 할 정도로 빈약해진 상태였음으로 부()를 누리던 진성이씨 문중으로 하사함으로서 일석이조,... 군왕지지의 터를, 즉 정자를 지키게 되고 공신에 대한 명분도 세우게 된 것입니다.

 

하여 마성면 노목리의 진성이씨 문중에서는 완전히 피폐하여진 정자를 중수하기 위하여 모금을 하게 됩니다.

 

1927년에 문경농민 폭동사건이 일어나게 된 동기가 당시 서애선생의 후손이던 유범우(혹은 일명 유굉목)라는 사람이 마성면장으로 재직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일제가 동양척식을 내세워서 조선의 수탈을 시작 할 당시였습니다.

 

마성면 노목리(늘목)의 진성이씨 문중의 토지 630여 정보(200만평)을 면장의 직권으로 등기서류를 조작하여서 동양척식에 상납을 하는 사태가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마성의 진성이씨 문중에서 항의를 하게 되고 실력행사를 하게 되었던 것이 바로 문경농민폭동사건 이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는 1930년도 일제에 의하여 재판 기록을 제가 국가기록원으로 부터 입수하여서 보관하고 있습니다.

 

이 결과 노목의 진성이씨 문중은 쇠락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봉생정 정자를 중수하려니 재정이 없어서 유림에 모금을 하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봉생정은 노목리(늘목)으로서는 방계 (직계이신 온계의 친 동생이신 퇴계)의 수제자라고 알려진 서애선생께서 학문은 퇴계선조의 수제자라고 할 만큼 높았었고, 임진왜란 당시 끝까지 임금을 수행하여 피란을 하였던 충신이고, 부모님에 대한 효, 형제간의 우애, 즉 학문과 충, , 우애까지 겸비한 서애선생을 본 받자라고 봉생정 정자의 중수에 대한 명분을 정한하였던 것입니다.

 

하여 서애선생 문중에서 자기 스승의 집안인 진성이씨 문중에서 서애선생을 본 받자하는 명분으로 정자를 중수한다고 하니 그 중수비용의 거의 절반에 가까운 거금을 협찬하게 되었던 것이 와전이 되어서 서애선생이 다녀갔었다는 둥, 또는 서애선생이 지었다고 왜곡되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이는 제가 보유하고 있는 봉생정기 복사본으로 증명 할 수가 있습니다. 또한 약 20여 년 전에 저의 선고 이병재 선생께서 봉생정 도청으로 계실 때, 선대 서애선생의 종손께서 관광버스 3대에 서애선생 문중 사람들과 함께 봉생정 정자를 서애선생께서 지으셨다고 하니, 그 사실을 조사하여 보시고, 서애 문중 재산으로 편입을 시도하시겠다면서 봉생정에 오셨던 것을 서애선생 문중에서는 기억하시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당시 제가 봉생정을 관리하시던 신현3(현 고인이신 봉생리 이장님, 휘자는 기억이 나지 않고 성씨는 신씨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장님의 연락을 받고 봉생정으로 가서 이러한 사실들을 말씀드리니 당시 서애종손 유영하 어르신께서 인정하시고 안동으로 가신 것을 서애선생 문중에서도 기억하시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봉생정은 조선조정에서 연대 미상으로 정자를 지었다가 임란 이후 마성 늘목의 진성이씨 문중에 하사하신 것을 중수하는 과정에서 서애선생을 본받자는 명분으로 인하여 서애선생 종가에서 거금을 협찬 하였던 것이 와전되어서 왜곡이 된 것이라고 정의 할 수 있습니다.

 

문경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바로 잡아서 서애선생이 자주 찾던 곳이라는 말은 고증하여야 할 것입니다. 현재까지 서애선생이 문경에 한번이라도 오신 기록을 보지 못했으며, 당시 안동에서 한양을 가려면 죽령을 넘어서 바로 가는 길을 두고 문경까지 와서 그 험하였던 문경새재를 넘어서 한양으로 몇 백리를 돌아서 갔었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괴변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서애선생께서 봉생정자를 지었었다는 말도 바로 잡아야 합니다. 한 번도 문경 땅을 밟지 않으신 분이 어떻게 정자를 지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봉생정에 관련된 이야기를 사실에 입각해, 왜곡된 부분을 하루빨리 바로 잡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문경매일신문

문경매일신문 (shms2015@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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