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소향전 34 김경수 조금 전까지 시끌벅적대던 집에 소향은 혼자 남겨진 것 같은 적막강산을 느낀다. 가는 여름을 재촉하는 개구리 소리가 밤의 기운을 타고 멀리서부터 들려온다. 파도 소리에는 익숙한 소향의 귀지만 개구리 소리가 이렇게 성가시게 들릴 줄은 몰랐다. 뒷문 밖에서 환상이라도 들이닥칠 것 같은 어둠의 두려움이 갑자기 소향을 위협한다. 대들보도 굵은 뱀이 되어 곧 내려올 자세다. 낮에 털을 뽑힌 닭이 벌거벗은 채 부리를 꼿꼿이 세우고 달려든다. 소향은 달음질을 친다. 그러나 발이 허공을 휘저을 뿐 귀신에 뱀에 그리고 털 뽑힌 닭에 에워싸여졌다. -악!- 소리를 지르며 눈을 뜨자 앞에 큰아지매가 서있다. -너 왜 그리 소리를 지르냐? 그저 깨우느라 불렀을 뿐인데?- 의아한 듯 큰아지매는 양미간을 좁혀서 말한다. 소향이 일어서서 엉덩이를 털어내며 -꿈을 꿨어예. 아지매한테 소릴 지른 기 아이고예- -그나저나. 물이 없어서 설거지도 못한 모양이네. 일이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나만은…그래서 항시 물독은 채워 놓았어야 했는데- -작은 아지매가 지하고 낼 아침에 물이로 간다꼬 했어예- -그렇다 해도 웃말샘은 물이 딸릴 텐데. 소향아!- 나직이 부르는 큰아지매다. -와예?- 악몽 속에서 깨어난 소향이 큰아지매가 옆에 있어서 다행이라고 느끼며 대답한다. -내가 너를 오게 한 것은 물론 집안일 시키려 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일이란 조심스럽게도 해야 하고 또 너도 집안의 사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익힐 시간도 필요할 것이고 사람들도 익혀야 할 것이니 당분간은 동서 옆에서 집안일 거들면서 차차 정도 붙이고 해라. 동서라는 사람은 좀 억세고 덜렁대지만 사실은 착하고 악한 맘이라곤 없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 광수하고 재수는 우리집이 저희들 집이라 생각하고 큰 아이들이다. 철이 없어도 아직은 아이들이니 너가 잘 돌보아주고. 그러나 내가 한 말은 꼭 명심해서 기억해라. 아무에게도 우리 얘기는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말이다. 나머지는 모두 내가 알아서 할 것이니. 알겠지?- 소향은 다 알아듣는다. 이미 몇 차례 주고받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압니더. 지는 오히려 일하고 바쁘게 사는 기 팬합니더. 작은 아지매한테 마이 배울끼고예- -그래. 그리고 낼부터 샘일이 끝날 때까지 우리 집이 좀 바쁘게 생겼다. 영감 말이 새참하고 점심저녁을 우리가 해주어야 할 모양이라 물이 젤로 문제구나- -지가 이고오민 됩니더. 물은 지가 마이 이봤습니더.- -그렇다 해도 웃말은 여기서 한참이나 되니…. 늦었구나. 너도 들어가서 자거라. 낼부터 바쁠 거다- 뒤돌아서 남폿불을 벽에서 떼어낸 큰아지매는 부엌 밖으로 나간다. 소향도 깜깜한 부엌에 있기 무서워서 얼른 큰아지매의 남포불빛을 따라 마당으로 나서자 개구리 소리가 한층 더 크게 들린다. 샘가에 큰 멍석이 펼쳐져 있고 막걸리에 전 몇 가지와 김치가 일꾼들을 위해 차려 있고 지목수가 장씨의 전달을 받아서 일꾼들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떠돌이 장씨는 지난봄인가 김씨네 별채 수리하러 지목수를 따라 한 번 왔을 뿐 마을은 그저 생소하지만 그래도 인근에 대목수로 소문난 지목수는 평생을 이곳저곳 다닌 탓에 태봉마을도 그다지 낯선 곳도 아니고 또 마을 사람들도 지목수의 일에 대해서는 믿어주는 참이라 그의 말이 일꾼을 통솔하기에는 한결 쉬운 것이다. -목수님, 무너진 곳이 위에서 한 여덟 자나 되니 그곳까지는 샘가를 다 파내야 합니다. 돌을 쌓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샘가를 대여섯 자 넓이로 파내려가야 돌도 들어내고 다시 나중에 제대로 다질 수도 있으니 힘쓸 사람들에게 삽질부터 시키시지요. 그리고 돌은 좀 알아보셨나요? 밑에는 그대로 써도 될 성싶으니 무너진 곳에서부터 위까지는 큰 각석으로 쌓아야 할 겁니다- -자네 말이 맞다. 안 그래도 내 벌써 돌은 점촌에 있는 석수한테 시키놨다. 근처에는 돌이 없는기라, 케서 점촌까지 안 갔나? 그런데… 자네 참말로 저 밑에 있는 돌은 개안켔나?- 돌이 무너진 곳까지만 새로 쌓으면 된다는 장씨의 말이 그래도 걱정되는 지목수는 다시 한 번 묻는다. 매사 하는 일마다 나중을 생각하여 후사가 없도록 그리고 꼼꼼히 다지고 손끝 맵게 일하는 지목수로서는 그저 중간까지만 새로 쌓자는 장씨의 말이 조금은 염려가 되는 참이다. -목수님. 샘 속을 한번 들여다보십시오. 땅에서 예닐곱 자 정도까지 돌들이 불거져있습니다. 그 이유는 샘가에 물이 땅속으로 스며들어 가서 흙을 다지니 그 토압이 다시 돌을 밀어붙인 겁니다. 무너진 곳 밑에는 땅이 깊어서 물기가 들어가질 못했으니 예전 그 모양 그대로 있는 거지요. 그래서 이참에 땅도 제대로 다지면서 돌을 쌓지만 샘가에 물이 다시 샘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시멘으로 널찍이 발라야 합니다- -그래! 자네는 들어가서 봤으이 알제, 듣고 보이 그래 하민 되겠다. 자! 자! 우선 땅부터 파고 봅시다. 널찍하이 둘러서서 우리 키로 하나 반은 파야 하이 힘 좀 써봅시다- 마을에 유일하게 젖줄 노릇하는 샘이 하루아침에 무너졌으니 큰일은 큰일이라 힘깨나 쓴다는 장정들은 삽이며 괭이며 가래를 들고 모였다. 다행히 백중 무렵의 농사일이 잠시 숨 돌릴 틈을 주는 참이고 그리고 큰 이유는 어제 태섭의 집에서 결정된 일이니 마을사람들 대부분이 함령김씨 논밭에 입을 붙이고 사는지라 감히 거역하거나 눈 밖에 날 수 없는 것이었다. 장씨는 누가 하든 말든 대뜸 삽을 들고 땅을 파기 시작하고 멍석에 우우하고 앉아있던 사람들도 엉덩이를 들고 샘 주위로 몰려들어 파기 시작한다. -이 무신 지랄이고? 백중이몬 가을 오기 전에 개 잡아 묵고 닭 잡아 묵고 힘을 길러나야 되는데. 씰데잖케 땅 파고 안 있나? 우리가?- -문디, 그기 말이라꼬 하나 지금? 이만하이 다행이제. 바쁠 때 이런 일이 있어봐라. 우짤끼고? 그저 신명님이 돌봐 주시가 이만하이 된기라. 주디 다물고 어서 땅이나 파라!- -저 니리 자슥은 하루 종일 땅 파게 시키서 주디 놀릴 힘도 없구러 맹글어야지 안 그러면 짖기는 말마다 되도 안 한 말만 한데이- -아! 행님도 어제는 마을에 변고라 해놓고 오늘은 또 딴말하네? 그카민 안 됩니더! 누가 듣고 본다꼬 말 바꾸고 안 보민 또 딴소리하고- 돌부리에 걸리는 삽날은 힘을 있는 대로 다 뺀다. 말을 주며 받으며 싫어도 해야 하고 안 하면 안 되는 마을일이다. -우짜꼬~ 여 오이 술이 그저 남아도네- 한쪽 다리가 휘어붙여진 꾸루와이가 뒷짐을 지고 나타났다. 그러나 아무도 그의 말에 대꾸를 하거나 눈길을 주거나 하지도 않는다. 그저 못 본 체 못 들은 체하며 주고받던 농담도 뚝 끊고 파는 땅에 눈길을 줄 뿐이다. 꾸루와이는 성한 다리는 멍석에 꼬부리고 병신 된 다리는 쭉 편 채로 앉아서 술을 한 사발 그득히 부어 연거푸 두세 잔을 들이킨 후 입가를 맨손으로 훔치며 그제야 정신이라도 난 듯 주위를 둘러본다. -야, 야, 종필아, 이리 온나. 한잔하고 하거래이. 땡빛에 익는다 익어- 그중 제일 만만하게 여겨졌는지 자기보다 연하인 종필이를 불러댄다. -행님요, 지금 일하는데 우째 지만 술을 합니꺼? 이따 점심때 하입시더- -야, 이 자슥아, 니 내 술은 술이 아인 모양이제? 그칼래?- 다짜고짜 쌍심지를 돋우며 눈을 뱀눈처럼 찡그려대는 꾸루와이다. 태광은 어제 먹은 덜 깬 술을 아직도 이기느라 숨을 씩씩거리며 느지막이 샘가에 걸어오니 일은 한참 진행되고 있었다. 멍석에서 혼자 술잔을 놓고 있는 꾸루와이를 보고는 태광은 고개를 모로 돌려 일을 거들고 있는 지목수에게 말을 건넨다. -욕 보십니더. 목도 좀 축여 가민서 하시지- 그저 건네는 건성인사다. -아, 와예, 우린 벌써 한잔 했십니더- 단 한마디로 지목수는 도로 하던 일에 집중한다. 다시 한잔 더 따른 꾸루와이는 게눈으로 태광을 힐긋거리며 술잔을 입에 데었다 내려놓고는 무슨 작심이라도 한 듯 입을 옆으로 한껏 째고 다신 후 헛기침부터 내놓는다. -보게, 태광이. 여 좀 앉게나- 말은 태광이에게 하지만 눈은 잔에 따르는 술에 두고 있다. 사실 꾸루와이가 “~하소” 하는 사람이 마을에 몇 안 되고 특히나 자기보다 나이가 적은 사람에게 하소, 라곤 하는 법이 없는 꾸루와이인데 나이로 치면 태섭이 또래이니 태광에게는 그저 막 대할 만도 하지만 그래도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물론 봄에 일어났던 삽자루사건 이후로 서로 대면한 적도 없고 또 꾸루와이가 짓던 모든 소작을 다 내놓은 상황에 태광에게 하대도 못할 것은 없지만 왠지 함부로 하기에는 껄끄럽게 느끼는 꾸루와이다. 태광도 맘이 편치 않다. 저 개 지랄 같은 놈은 왜 여기에 왔누? 하면서 눈을 애써 외면하던 차 앉으라는 말을 들었다. 그렇다고 그 자리를 그냥 벗어나면 항차 마을에서 이고 살아야 할 뒷얘기가 체면을 구길 것이고 상대를 하자니 뒤가 걱정도 되는 태광이다. 이런저런 생각에 그저 인부들이 하는 일에 건성으로 눈을 주고 있는 사이 아무 대답이 없는 태광에게 꾸루와이가 싸늘한 말을 던진다. -내 말은 귓꾸녕에 안 들리는갑제?- 이제는 조소를 띈 얼굴로 태광의 뒷모습을 응시한다.
문경매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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